저는 책을 읽을 때 독특한 습관이 있는데요. 무대 위에 배우들을 올려놓거나 영화 화면 속에 등장인물을 넣는 식으로 상상하는 습관이죠. 다른 분들은 책을 읽을 때 어떻게 상상하면서 읽으시나요? 심지어 인문학이나 단순 정보 전달의 글도 이제는 해설자가 나와 설명하는 식으로 읽게 됩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제가 무대에서 말하고 있다고 상상하곤 해요. 이 독특한(?) 독서 방법은 소설에서 빛을 발하는데요. 독일에 있으면서 너무나도 읽고 싶었던 책,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했습니다. 종종 영화나 연극이 아니라 아침 드라마의 풍경이 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죠. 단편 영화의 필터를 썼다가도 어느새 너무나 한국적인 가족 배경이 나오면 넌지시 아침 드라마의 으레 그 밥 먹는 식사 장면이 펼쳐집니다. 그러다가 문득 공포 영화가 되기도 하고, 어느 장면은 고요한 연극이 되기도 합니다.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 중앙에 놓인 한 여성의 변화 과정을 이야기하는데요. 시간의 흐름은 계속되지만 시점이 변경되니, 마치 카메라 앵글이 변화되는 것처럼 읽혔습니다. 첫 번째 시선은 여성의 남편입니다. 따분할 정도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부부에게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기게 되고, 거기에 적응하면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심리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비디오 아트를 하는 이 여성의 언니의 남편, 형부의 시선입니다. 광적으로 여성에게 집착하는 것이 예술 때문인지 성욕 때문인지 모호하지만, 그 복잡한 심리가 파멸로 치닫는 이야기가 굉장히 흡입력 있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의 시선은 이 여성의 언니입니다. 가장 따뜻한 시선인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한 어투라 충격적인 결말도 담담히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화자가 각기 다른 이 세 개의 짧은 단편이 하나의 장편으로 이루어지면서 한 시간짜리 영화를 본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작 주인공의 시선은 빠져 있고 주인공의 생각은 짧은 대화나 꿈속의 묘사로만 이루어져 있어 선뜻 그녀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주인공의 내면이 복잡하고 깊이 있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세 명의 한정적인 시선과 더불어 독자의 시선마저 주인공에게는 폭력적인 것으로 느껴지겠죠.
맨부커상을 탔다고 언론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떠들썩하게 굴었기 때문에 오히려 반쯤 의심하고 보았지만, 강렬하고 찌릿하게 무언가 확 들어오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었어요. 하룻밤 사이에 빠르게 읽어갔고,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한강의 다른 소설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랫동안 한국 작가의 글은 읽지 못했는데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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