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일요일 저녁, 비가 와서 산책은 짧게 하고 집으로 돌아 와서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분명히 언젠가 읽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이렇게 강렬한 이야기를 쉽게 잊을 수는 없었겠지요. 삼십분에서 한시간 정도 되는 짧은 시간 내에 빠르게 읽어버렸습니다. 흡입력 있는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다음 페이지를 잡고 있는 손가락이 초조해질 정도 였어요. 읽는 내내 연극으로 분명히 이미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시나 프랑스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여러번 각색되어 공연이 되었었더라구요. 아니면 차라리 처음부터 소설이 아니라 연극으로 씌어 졌어도 상당히 괜찮았을것 같습니다. 한정된 장소안에서 두명의 남자가 나누는 대화만으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이 나거든요. 희곡이 갖추어야 할 법한 모든 제약들 안에서 강렬한 사건이 대화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죠. 연출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면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고요.
유투브에서 원작이름으로 찾은 영상, 검색을 통해 한국에서도 여러번 공연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짧고 단순한 이야기 구성속에 상당히 많은 주제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가치관, 자아에 대한 탐구, 혹은 우리가 타자를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종종 인용되는 많은 책들이 제게는 너무 낯설었지만 문학세계사 성귀수 님의 역자 해설로 큰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일상적 대화체가 아니라서 사실 번역 말투에 거부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머릿속에서 잘 상상하며 받아들여서 해석을 했습니다. 요즘의 번역본도 이런 말투로 출판 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희곡을 많이 읽고 자라서 그런지 대화 번역체에 굉장히 민감한 편입니다. 항상 번역된 글을 읽을 때마다 배우가 낭독을 하는 상상을 하곤 해서요. 어쨌든... ) 철학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이 책의 진정한 묘미는 낯선 이를 잔뜩 경계하고 그와의 어처구니 없는 대화에서 끊임 없이 도망치고자 하는 주인공이 경찰을 부르면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비행기가 연착 되며 대합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남자에게 한 남자가 다가옵니다. 시시껄렁한 주제로 말을 거는 남자는 조금 이상해 보이지요. 주인공은 끊임 없이 말을 거는 이 미친 남자로부터 도망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이리 저리 궁리해 볼수록 이 남자의 관심은 점점 더 광기에 가까워져서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지요. 귀를 틀어 막아도 대화를 피할수 없었던 불쌍한 주인공은 이것은 강간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미친 남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일화부터 첫 살인과 첫 사랑등에 대해 꿋꿋하게 이야기 합니다. 주인공은 이 남자가 자신을 스토킹 했다고 생각하고 경찰들에게 넘기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인생에서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나면, 스스로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기 보다 자신의 실수를 이끈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이 편합니다. 스스로를 괴롭힐수록 실수의 흔적은 짙어지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에 망가져 버리거든요. 대신 여러 변명거리를 만든 뒤에 어쩔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제 인생의 실수를 아직까지도 제 탓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것과 믿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내 실수였음을 스스로 자각하고 돌이킬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스스로를 원망하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결국 나는 나로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원망한 뒤에 그 누군가를 다시는 보지 않고 기억해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차라리 쉽습니다. 결국 타인이란 나와의 관계를 맺는 어떤 존재일 뿐이기 때분입니다. 관계를 종료시켜버리고 나면 원망만 남을 뿐 후회는 희미해지지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그리고 어쩔수 없이 타자를 의심하고 경계 하지요. 사랑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노력으로도 그 어떤 확신으로도 타자를 자기 자신을 믿는 만큼 신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타자로서 존재합니다. 결코 타자를 자아만큼 소유할수 없으며 사랑할수 없고 신뢰할수 없습니다. 이 사실이 개인을 외롭게 만들고 인간 관계나 인생에 회의감을 갖게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진정 경계해야 할 상대가 과연 타자일까요? 언급했듯이 타자와의 관계는 관계를 종료함으로써 끝낼수 있기 때문에, 경계한 노력의 성과도 없이 힘없이나의 인생에서 그의 존재가 사라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스스로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에 발견되어 경계없이 받아들이지요. 그리고는 돌이키기 힘든 그 어떤 모습으로 구성되어 버리고 맙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나는 이미 나이므로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본래 가지고 있던 성질을 사라지게 만들기가 힘이 듭니다. 이토록 중요한 것이 타인이 아니라 자아임에도 우리는 너무나 경계심 없이 자아를 받아들이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와의 첫 만남이 잘못되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아와의 관계를 끊어낼수 있을까요?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아니면 자아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가능 할까요? 인간이 자신을 가장 사랑할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을 부정하고 미워하게 되는 순간 그 무엇도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도록 내면으로부터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연극배우 시절에 무대위의 나를 타자화시켜 객관적으로 바라보라는 가르침을 많이 받아봤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바라볼수가 있을까요? 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동시에 무대위의 자신을 동시에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 할까요? 감정적으로 흐르는 육체는 자연스럽게 놔둔 채 이성이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면 가능합니다. 철학적인 접근같지만 연극 배우들이 갖는 연기술의 방법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무대위의 배우들만 끌어낼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아닙니다. 시간차이가 있을수 있겠으나 과거를 되돌아 보거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모든 이들이 가지는 평범한 사유 방법이니까요. 본능이나 감정과 달리 이성이란 이토록 중요합니다. 강간이나 살인을 억제하는 것도 다른 이와 관계를 맺거나 사랑을 하는 것도 이성이 도맡아 하죠.
아멜리 노통브의 적의 화장법은 결국, 누가 적인지를 묻는 소설입니다. 우리의 적은 화장, 위장, 혹은 어떠한 질서 속에 철저하게 감춰진 채 존재합니다. 그 적이 우리가 항상 적이라고 인식하던 타인이 맞을까요? 아니면 꼭꼭 숨겨져 우리의 내면속에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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