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나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은 그다지 자주 이렇게까지 자신의 나이를 매일매일 되새기며 살지 않는 것 같은데, 저 혼자서만 유독 벌써 서른여섯인데 곧 마흔이 될 텐데 하면서 조급해져요.
주말이라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어요. 새 지저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으니까 누군가에게는 너무 잔인할 정도로 무료하고 고요한 주말이겠지만, 저한테는 겨우 일주일에 한두 번 오는 소중한 시간이죠. 쓸데없는 걱정이나 망상이 시작되면 쉽게 끝내지 못해서 책을 읽을 시간이 줄어드니까 이왕이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래도 오늘 이 이야기는 마무리 지어야겠습니다.
저는 왜 유독 나이에 집착할까요?
밤에 잠잘 준비를 할 때 낮의 활동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핸드폰을 늦게까지 본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일종의 보복심리라고 합니다. 종일 일하고 돌아와서 자기만의 시간을 맘껏 누리지 못했을 때 흔히 하는 행동이래요. 근데 그게 일종의 자기 학대라고 합니다. 어쨌든 신체는 수면이 굉장히 필요한데도 억지로 잠에 들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거니까요. 욕구에 반하는 행동을 스스로 하고 있는 거죠.
왜 이 이야기를 꺼내냐면요. 제가 지나간 나이를 제때에 잘 보내주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낮에 즐기지 못한 혼자만의 시간을 밤에 서둘러 보상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저도 어린 시절 겪지 못했던걸 계속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그 나이에 으레 하게 되거나 겪을 일을 저는 좀 일찍 경험하거나 아니면 아예 뛰어넘을 때가 많았거든요. 큰 틀에서 특이한 패턴이 자주 일어나는 편인데 자의적일 때도 많았지만 주로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지나가는 게 너무 아쉬워요.
유난히 예민하고 감성적인 데다 지독하게 어른스러웠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요. 또래들과 놀 때는 몇 살이나 어린 동생들을 돌봐주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초등학생인데도 성인들과의 대화가 더 편했던 것 같아요. 어디를 가도 이방인처럼 느껴졌었어요. 일부러 아이답게 굴기 위해 노력한 적도 있고요. 명절 때 친척 중 한 분이 제가 너무 어른스러운 아이라 징그럽다는 말을 했을 때, 저 스스로도 제가 그렇게 느껴졌던 기억도 있거든요. 그래서 밤새도록 밖에서 놀다가 부모님께 꾸중을 듣는다 던가 옷을 더럽혀 온다던가... 그런 기억이 아예 없어요. 그건 늘 동생들이 저지르는 일이었고 어린 시절의 전 그냥 혼자 책만 읽었어요. 그게 거의 모든 놀이의 시작이자 끝이었던 것 같습니다.
책을 고를 때 나이에 맞는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성인이 읽어야 하는 소설들도 너무 빨리 접한것 같아요. 잔인한 묘사가 많았던 앙드레 까스텔로의 '프랑스 대혁명'이나 농촌계몽운동에 연애 서사가 들어있는 심훈의 '상록수', 하루키 답게 성적 묘사가 너무 자세했던 '노르웨이의 숲'을 초등학교 때 읽었어요. 지금은 그게 사고였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고모의 책장에서 꺼내 명절 내내 읽었고, 상록수나 노르웨이 숲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열리는 중고 장터에서 사 읽었어요. 동네에 작은 서점에서는 주로 초등학생 추천도서만 골라 읽었으니까 크게 문제가 될만한 책이 없었고, 부모님이 사주셨던 위인전, 과학서적, 백과사전 등 전집 단위로 읽어서 여기에서도 문제가 될 게 없었어요. 물론 위의 세 개의 책보다는 덜하지만, 세계 문학 전집 같은 곳에서 죄와 벌이나 아Q정전, 안나 까레니나, 파우스트 이런 것도 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냥 읽었는데 저는 사실 초등학생이 이런 것도 빨리 접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영화처럼 모든 컨텐츠에는 나이 제한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당시에는 잡히면 그냥 닥치는 대로 읽던 때라 읽으면서 너무 충격을 받았고, 특히 살인이나 성교를 하는 내용들을 읽고 있으면 알면 안 되는 걸 알아버린 거대한 죄책감에 오랫동안 우울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사실 어떤 책을 읽어보라는 말보다는 책 좀 그만 읽으라는 소리만 엄청 들었거든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랜턴으로 책을 몰래 읽거나, 수업시간에 교과서 아래 책을 숨겨 읽던 기억이 저한테는 정말 강렬하게 남아있어요. 다독이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려면 제 것으로 만드는 충분한 시간과 자기만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제 어린 시절에서는 그런 게 뭔가 다 빠져버린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오락성으로 보자면 중독 수준의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그 외 부분에서는 거의 다 마이너스였던 것 같아요. 어른들의 착각 중에 책을 많이 읽으니까 똑똑하다거나 큰 인물이 될 거라거나 뭐 그런 게 있잖아요. 저는 그냥 책을 좋아하는 어른으로 자랐을 뿐이에요. 책을 많이 읽고 적게 읽고는 취미생활의 영역에만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저처럼 마구잡이로 책을 접하게 되면 더 그렇죠.
아무튼 공개된 장소에 그나마 솔직하게 말할수 있는 핑계를 대자면 책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놀아야 할 때 놀지 못하고, 배워야 할 때 배우지 못하고, 경험해야 할 때 하지 못했던 게 저한테 정말 큰 문제였어요. 오직 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던 10대 때는 관계에서 미움을 받아도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는데, 뭔가 인간관계를 잘 쌓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20대부터 저 스스로가 참 힘들었어요. 상대방이 어떤 기분인지 어떤 생각인지는 예민하게 느껴지는데 제가 뭘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거든요. 허둥지둥 서두르다 실수할 때도 많았고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그게 오해라고 변명할 때마다 더 비참해졌고요.
30대가 되었다고 해서 사람사이의 관계를 잘 쌓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그냥 상처를 덜 받게끔 단련이 된 거죠. 그리고 애당초 욕심을 덜 부려요. 아무리 노력해도 우정을 쌓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호감을 표현해도 저한테 다가오지 않는 사람도 있죠. 반대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곁에 있는 친구들도 있고요.
최선을 다해도 아쉽지 않게 지나간 한 때는 없는 것 같아요.
최근에 정말 긴 시간동안 친구였던 사람이 내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어서 실망하게 되고, 멀어지는 경험을 했어요. 한쪽에만 좋은 관계는 없잖아요. 거의 20년 동안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였는데, 그냥 서로 너무 달라져 버렸어요. 성격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많이 달라서 이끌렸던 관계인데 결국엔 그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어요. 아마 제가 싫어하는 게 잠수 이별인걸 알아서 그랬는지 그렇게 이른바 손절을 당했어요. 제가 그 정도로 못나게 굴었나 싶어서 상처도 받긴 했지만, 방법보다는 이제 관계가 끝났다는 데에서 오는 허탈함이 더 컸어요. 서로 이 관계에 미래가 없다는 걸 알고나서부터 거리가 생겼는데 그걸 좁히지 못했네요. 지난 20년의 기억에서 그 친구가 차지하는 공간이 매우 컸었기 때문에 상실감도 그만큼 큰 것 같아요. 그 긴 추억을 다시 메꿔줄 사람은 새로 만들 수가 없으니까요.
후회가 되어서 시간을 붙잡고 싶은건 아녜요, 바꾸고 싶어서도 아니고요. 그냥 온전히 그 시간 속에 있지 못하고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자꾸 지나간 시간을 곱씹게 되네요. 그러다 보니 지금 벌써 내가 몇 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럴 때마다 다시 십 년 뒤엔 지금 이 시간을 그리워할 텐데 열심히 지금을 즐겨야지, 하면서 정신을 차려보려고 노력해요. 온전히 그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어떤걸까요? 미래에 대한 걱정도 좀 없고, 과거를 되새기며 그리워하지도 않고 하고 있는 행위 자체에만 몰두하는 걸까요?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잠깐만 멈춰달라고 말하고 싶네요. 들숨 날숨에 불안함과 그리움이 쏟아지는데, 숨도 멈추고 고요하게 있어보고 싶어요. 아주 조용한 오후지만, 조금 더 조용했으면 좋겠어요. 지나간 시간들에 집착하는 저도 싫고, 미래에 기대가 그다지 크지 않은 시간들도 싫어요. 주변에 간섭하고 싶지 않다가도 신경이 쓰이고, 아무도 나를 몰라줬으면 좋겠지만 외롭고 싶지 않은 모순된 생각들이 허공에 계속 떠돌아요. 뒤로 갈 수는 없고 머물러 있는 것도 할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가기는 싫어요.
다시 책을 읽으러 가겠습니다. 이 괴로운 생각들에는 끝이 없어요. 지나가는 시간이 잡힐리도 없죠. 시간과 운명의 신이 흥미가 발동해 잠깐 시간을 멈춰준다고 해도 사실 그게 진짜 제가 원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넷플릭스에 '샌드맨'이라는 시리즈가 있는데요. 거기에 나오는 죽음의 신이 한 인간에게서 '죽음'을 가져가서 영생하는 에피소드가 나와요. 엄청 부러웠는데, 생각해보면 오히려 제가 바라는 건 영생일 수도 있겠어요. 지나간 시간이 그리운 것도,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그다지 기대가 발동하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길어봐야 백 년인 인생의 한계 때문이니까요. 만회할 기회가 충분하고 다시 살아볼 기회도 충분하다면 이렇게 복잡하지도 않겠죠.
영생으로 끝맺는 주말 오후의 끄적임이라니, 이러니까 자꾸 내 나이가 몇인가 싶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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